Soundsuit, Nick Cave. Photo by James Prinz. Copyright Artist


7 5일까지 옐바 뷔에나 센터 포 디 알츠(the Yerba Buena Center for the Arts)의 갤러리에는 닠 케이브(Nick Cave. 랔 밴드 닠 케이브와 나쁜 종가(Nick Cave and Bad Seed)의 호주 가수 닠 케이브랑은 다른 사람이다)의 전시 지구의 중심에서 나랑 만나요(Meet Me at the Center of the Earth)”가 열린다.

          이 전시의 시발점은1991 3 2일에 발생한 로드니 킹 사건이다.  케이브(그는 현재 50세이다)는 로드니 킹 사건 이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고백한다.  사건은 그를 점점 더 흑인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흑인이란 생각의 그림자는 긍정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던 그가 시카고의 그랜트 공원(Grant Park)의 한 벤치에 앉아있다,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작은 나무 가지들을 바라보다, 영감을 얻게 된 것은 1992년의 어느 날이었다.  그는 나무 가지들에 작은 구멍을 뚫고, 그것들을 실로 연결한 후, 자신의 내의(內衣)를 덮었다.  그것을 입고 움직여 보고, 놀라게 되었다.  입기 전에는 조각처럼 보이던 것이 입는 순간, 두 번째의 피부가 되고,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 후 케이브는 그의 입을 수 있는 조각을 소리옷(Soundsuit)”이라 이름 지었다.  그는 1992년 이후로 계속해서 다양한 소리옷들을 만들었다.  나무 가지에서 시작된 소리옷은 점점 발달했다.  전시에서 보여지는 소리옷들은 단추, 깃털, 사람 머리카락, 수판셈 알들, 사이살 삼, 염주, 등 다양한 재료들로 만들어졌다.  재료들에서 빚어나는 색채들은 원초적으로 휘황찬란하다.  도심의 저녁을 메꾸는 네온 사인들과는 다른 원색들이다.

색채와 소리옷들이 가지고 있는 형상들이 결합되며, 어렵지 않게 주술적인 느낌을 관객에게 드리운다.  더욱이 소리옷들 옆에 투사되는 영상들-소리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댄서의 움직임을 녹화, 문서화한-이 그 느낌을 북돋는다.  케이브 또한 소리옷을 입는 순간 느껴지는 힘, 마치 가면을 쓰는 순간 자기로부터 벗어나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소리옷을 입는 순간 스스로가 변화되어 샤맨(shaman)같은 주술적인 인물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어린 여자 아이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이 옷 저 옷을 갈아입으며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며, 즐거워하고, 다양한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니 케이브의 육중하고 동물적인 혹은 아프리카의 어떤 부족을 연상시키는 원초적인 소리옷 속에 기어 들어가, 그것들에 조여지며 몸을 움직인다면,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무엇인가를 느끼는 것은 당연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할 때, 강하게 소리옷을 한 번 입어보고 싶고,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느껴졌다.  케이브의 말을 따르면, 소리옷을 입고 움직일 때에는 그 무게 때문에 허리를 꽂꽂히 세우고 움직여야만 한다고 한다. 

메인 갤러리의 가운데에는 지구본 조각이 묻혀져 있다.  그것이 전시의 제목지구의 중심에서 나랑 만나요(Meet Me at the Center of the Earth)”를 시각화한다.  케이브는 전시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라도 소리옷과 영상을 느끼며, 생각하며, 함께 소통하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전시의 제목을 구상했단다. 

로드니 킹 사건에서 시작된 시간들에서 얻어진 영감으로 발전된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장이 로드니 킹 사건을 극복하는 혹은 그런 사건/비극이 더 이상 없는 지구를 꿈꾸는 장이라는 것은 인상적으로 필연적이다. 


6/14/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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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rank, San Francisco, 1956, Copyright Artist



에스에프 모마에서는 죠지 오키흐(George O’keeffe)의 그림들과 앤설 애덤스(Ansel Adams)의 사진들을 함께 묶어서 자연의 비슷함들(Natural Affinities)’이라는 제목의 전시, 그리고 로벌트 흐랭크(Robert Frank)의 사진들을 들여다 보기: 로벌트 흐랭크의 그 미국인들”(Looking in: Robert Frank’s “The Americans”)’이라 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자는 9 7일까지, 후자는 8 23일까지 계속된다.  전자는 두 말할 필요 없이 미국인들에게 가장 친근한 두 명의 예술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으니, 흥행에 실패한다면 놀랍겠다.  그러니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는 적격인 전시다.  후자는 1958년에 출판된 같은 제목의 책-그 미국인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전시이다. 

          1924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로벌트 흐랭크는 1947년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그 맘쯤 뉴욕에서 사진가 혹은 사진작가로 일을 했다.  1955년부터 2년 동안 구겐하임 휄로우쉽(Guggenheim Fellowship)에 힘입어, 미국전역을 돌아다니며 28,000여장의 사진을 찍었다.  식구들이 동반된 이 사진 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  예를 들자면 중부에서 감방에 갇히기도 하고, 한 도시에서는 한 시간 만에 떠나라는 경찰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

          28,000여장의 사진들 중 엄선된 82장의 사진들이 그 미국인들이라는 제목 아래, 한 권의 책 안에 담겨 출판된 것은 1958년 프랑스에서였다.  일년 후 미국에서 출판되지만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았다.  그러나 책은 이제 50주년 기념을 경험했고, 워싱턴 디..의 내셔널 뮤지엄 오브 알트(National Museum of Art), 에스에프 모마, 그리고 뉴욕 모마에서 책을 축하하는 전시까지 벌이게 되었다.  50년에 걸쳐 가치를 인정받은 사진들이니 안보면 손해 보는 사진들이다.

          사진들은 복잡한 감정들과 느낌들을 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년을 스위스에서 보낸 흐랭크에게 미국은 익숙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이 부분은 나이 이십이나 삼십이 넘어서, 혹은 십 대에 미국에 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부분일 것이다).  그러니 미국의 풍경들, 소리들, 그리고 감정들과 흐랭크가 어린 시절에 뛰어다니던 골목길, 옆집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사용하던 독일어 억양들, 부모님들의 얼굴에 묻혀져 다가오는 감정들 사이에는 빈 공간이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이 공간이 앞서 이야기한 사람들에게는 그리 이해하기 힘든 공간이 아니다).  그 공간에서 자라난 것들이 사진들이다.

          사진들에 담겨진 미국은 밝지 않다.  그것들은 인종과 계층을 담담하게 직시한다.  그리고 그 배경에 금전과 자본이 자리 잡는다.  인종, 계층, 자본의 조합 그리고 다행스럽게 그것들보다 많은 그 밖의 무언가가 담겨진 사진들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 생각과 감정들이 생겨난다.  특히 베이 지역에서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이 그 사진들 앞에 서신다면 진하게 피어 오르는 그런 생각과 감정들을 피하기 힘들 듯하다. 

 

2009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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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이 훼이(Cui Fei), Manuscript of Nature V. Courtesy of Chinese Cultural Center Online Gallery


중국 문화원(Chinese Cultural Center, 750 Kearny, 3rd Floor, 화요일-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4, 일요일 정오부터 오후 4)에서 8 23일까지 현재형 바이에니얼(Present Tense Biennial)”이 열리고 있다.  전시는 중국 문화원과 키어니 스트리트 웤샵(the Kearny Street Workshop)의 공조로 이루어졌다.

          샌프란시스코 모마(SF MOMA)와 버클리 아트 뮤지엄(BAMPFA)에서 열렸던 중국 본토 예술가들의 전시들과 어쩔 수 없이 병렬되고 대조되는 이 전시는 31명의 베이 지역, 그리고 해외 중국 작가들의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다.  전시의 초점은 다양한 작가들(중국계 미국인, 본토 중국인 등)이 바라보는 현재의 중국 문화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작품들 중 눈에 익숙해서 띄는 설치 작품 하나는 큐이 훼이(Cui Fei)의 것: 하얀 벽에 세로로 줄을 맞춰 나열된 나무 조각들이다(사진 참조).  나무 조각들을 벽에서 조금 떨어져서 보면 옛날 사람들이 멋들어지게 한지에 써내려 가던 한문들이 연상된다.  벽으로 가까이 가서 바라보면, 한문에 대한 환상은, 샌프란시스코 어느 공원에 가도 볼 수는 있는, 공원 바닥 여기 저기에 떨어져 있을 작은 나무 조각들이다.  그러니 한문이라는 언어에 대한 환상은 자연물로 형상을 바뀌며 물질화된다.  그렇다면 상형문자인 한문을 사용하는 중국 사람들은 자연과 한자 사이에서 사회를 이루고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자연에서 비롯된 문자 즉 자연의 모양에서 비롯된 환상을 기초로 이루어진 문자, 그 문자들로 꾸려진 문화를 몸과 마음에 받아들이며 살아가도 있는 것이다. 

문화는 실제로 마음과 몸에 커다란 각인을 남긴다.  예를 들자면 한글을 사용하는 우리 나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게는 영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한 오백년이라는 노래의 가사 한 줄을 생각해 보자. “한많은 이 세상 야속 님아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 이 문장을 읽는 한국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어떤 정서가 그려진다.  그런 정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창작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일컫어지는 작고한 아르헨티나 소설가, 번역가, 평론가, 그리고 시인이었던 호르헤 보르헤스(Jorge Francisco Isidoro Luis Borges)가 이야기 했듯이 말이다.  

문화가 몸에 미치는 영향을 찾아보자면, 요새는 평범한 미국 사람의 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 문신이 그것이다.  그것이 너무 작위적이라면, 다른 예로 재미 교포 이세들과 일세들의 얼굴 생김이 다른 것을 들 수도 있겠다.  이 이론은 확실하게 증명된 것은 아니지만 흥미롭다.  아시다시피 영어로 말할 때 사용하는 얼굴의 근육과 한국어로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얼굴의 근육은 다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영어로 이야기를 많이 하는 재미 교포 이세들의 얼굴 생김이 일세들과 다르다 것이다.   

이쯤에서 다시 전시로 돌아가자. 전시장에는 큐이 훼이의 설치 외에도 타마라 애바이티스(Tamara Albaitis)의 설치, 히로시 수기모토(Hiroshi Sugimoto)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토마스 창(Thomas Chang)의 사진들, 몽환적인 매일온(Maleonn)의 사진들 등 흥미로운 작품들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본토 중국인들의 모습과 문화, 미국에서 살아가는 중국인들의 모습과 문화, 정체성들에 대한 이미지들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케빈 첸(Kevin B. Chen), 애비 첸(Abby Chen), 그리고 엘렌 오(Ellen Oh)가 규레이팅했다. 



5/10/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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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과자들의 힘

그림들 2009/04/27 13:59 posted by 긴정한


Wayne Thiebaud, Cake bell, 17 5/8 x 18 7/8 inches, oil on wood, 2009, Courtesy of Paul Thiebaud Gallery, San Francisco.


어처구니 없이
, 혹은 예상치 못했던 많은 일들이 짧은 기간에 일어나는 경우가 생기면, 침착한 사람도 자기가 무엇을 하는 지 모르면서 무언가를 하게 된다.  그러다 그 기간이 물론 다른 여느 날들처럼 지나간다.  그 후 남게 되는 것은 먼지가 뒹굴고 있는 마루바닥.  먼지처럼 마음에 쌓여져 있는 감정들.

지난 몇 주가 그랬다.  갑작스런 친구의 죽음(어디에 계시든 평안하게 쉬시길).  예상치 못했던 여러 가지 사건들로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 돌아온 LA로의 주말여행.  침착해 보려고 노력했던 덕분에 딱딱하게 굳어 지냈던 시간들이었다.  와중에 평화로웠던 시간은 이런 저런 갤러리들에서의 몇 시간들. 

놀스 비치(North Beach)에 자리잡고 있는 폴 티바우 갤러리(Paul Thiebaud gallery)가 새로운 장소(645 Chestnut Street, San Francisco)로 이전하여 문을 열며 6 27일까지, 웨인 티바우(Wayne Thiebaud,)-작고한 리차드 디벤콘(Richard Diebenkorn)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생각되는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살아서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의 새로운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의 이름은 과자 기억들(Confection Memories)”.  웨인 티바우는 갤러리 주인 폴 티바우의 아버지다. 

웨인 티바우는 1920년에 태어나, 1938년부터 49년까지 상업미술가로 일하며, 간판, 일러스트레이션, 카툰 등부터 할리우드 영화 스튜디오의 미술가로도 활동했다.  1949년부터 50년까지 샌 호세 주립 대학(San Jose State University),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새크라멘토에 있는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California State University)을 다닌 그는 1960년대에 케이크, 사탕 등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로 유명해진다.  그 그림들은 그 당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중산층을 겨냥해 그려졌고, 아이러니컬하게 그 그림들은 이제 중산층들이 꿈도 꿀 수 없는 가격들로 거래되고 있다.  그런 측면은 앤디 와홀(Andy Warhol)을 연상시킨다.  또한 가게 창문에 진열된 듯한 티바우의 그림들 속 케이크, 사탕 등은 팝 아트(Pop art)에서 보여지는 상품에 대한 시선의 전조로 보여진다.

1960년대에 자신이 그린 과자들을 기억하며, 그 기억을 바탕으로 같은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굉장히 흥미로운 발상이다.  마치 어린 시절 그렸던 그림 일기장을 몇 십 년이 지난 후 다시 그리는 것 같다.  갤러리의 크기가 그렇게 크지 않지만, 옛날의 사탕과 새로 그려진 사탕, 옛날의 케이크와 새로 그려진 케이크 사이에 있는40년이라는 시간이 놓여있다.  40년 동안에 팝 아트, 행위 예술, 컨셉츄얼리즘,  미니멀, 비디오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이 놓여져 있다. 

전시를 보고 난 후, 시간이 좀 지난 후, 머리 뒤쪽에서 떠오르는 생각: 무려 40년 동안 그림을 그려왔기에, 앞서 열거된 커다란 장르들을 간단하게 뛰어넘으며 다시 과자 그림들이 표면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시장에서의 그 이상하게 초연하고 담담한 과자들은 이제 나의 상상 속에서 그 형형한 색들이 광원으로 변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어내는 달콤한 열쇠들이 된다.    


2009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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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종교와 디지털 영상

그림들/sf 중앙일보 2009/04/06 14:05 posted by 긴정한

노상균, 숭배자들을 위해서, 머리: 84.5x69x46.5 Cm, 손 1: 75x44x51 Cm, 손2: 77x40x46 Cm, Sequins on polyester resin and fiberglass, 2008. 사진 노상균. 사진과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323일 저녁 7 30분부터 830분 까지, 러시안 아방가르트, 소련 포스트모던 미술과 문학의 전문가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보리스 그로이스(Boris Groys)의 강연이 열리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San Francisco Art Institute, 800 Chestnut Street) 의 강의홀에 앉아 있었다.  그로이스는 철학자, 수필가, 미술 평론가, 그리고 미디어 이론가란다.  그의 글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러시아 철학의 근본적 차이를 합친단다.  휴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다른 커다란 직함들이 그의 이름 앞 혹은 뒤를 따른다. 

        강의의 주제는 현대 종교와 디지털 영상이었다.  그로이스가 처음 말문을 여는 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두 가지가 생각되었다.  하나는 그의 액센트: 유럽에 사는 러시아 사람의 액센트.  덕분에 심오한 강의가 더욱 더 난해해졌다.  하지만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다.  나 또한 대학에서 진한 한국 액센트를 사용하며 강의를 하고 있으니까.  진부한 이야기지만, 중요한 것은 액센트가 아니라, 어떤 내용 즉 가치를 담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학계와 현실의 차이.  학자로서 그로이스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가 공부한 이론들을 통해 굴절되어 비춰지는 이미지이다.  점 더 새로운 이론이 아니어서 조금은 실망스러우면서도, 그와 다른 한편으로 실망보다 더 크게 반갑고 편안하게도, 그로이스는 발터 벤야민(Balter Benjamin) 1930년 중반에 쓴 글 -기계복제 시대에 예술작품(The Work of Art in the Age of Mechanical Reproduction)-과 마샬 맥루한(Marshall Macluhan)의 미디어 이론을 기반으로 주제를 펼쳐나갔다. 

이 때쯤에서 들었던 생각은 그로이스가 가 사용하는 벤야민과 맥루한의 이론에 그로이스만큼 익숙한 사람들이 강의실에 몇 명이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몇 명이나 있을까?  극소수라고 답해도 틀리지 않을 듯싶다.  그렇다면 그로이스 혹은 강연 주최측에서는 그의 강연 중, 혹은 강연 전에 미리 청중들에게 벤야민과 맥루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았어야 할 법하다.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독자께 청한다.  위에 언급한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과 마샬 맥루한의 책 미디움은 메세지다(medium is message)’를 시간 나실 때 한 번 읽어보시길.  독서 경험이 현대 미술과 문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보장한다.  책을 보기 전에 마샬 맥루한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창조적이고 이색적인지를 맛보고 싶다면, 유튜브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서 직접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한 재미다.

        이쯤에서 간단하게 그로이스의 강의를 요약하면, ‘비디오를 통해 전파되는 현대 종교는, 복제의 복제를 거듭하며, 때로는 의도적으로 때로는 우발적으로, 권위를 확장시킨다였다.  따라서 그 과정과 현상의 관찰을 통해서, 개인이 할 수 있는 행위는 다음과 같다: 한 개인이 어떤 식으로 기존에 이루어지던 반복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치-그것이 무엇이든-를 스스로 결정해서 그 가치를 실행하는 행동을 반복하면 권위를 갖출 수 있게 된다, 마치 현대 종교가 그렇듯이.  강의와 연결된 전시는 뒤따르는 홈페이지에서 보여진다: http://www02.zkm.de/mediumreligion/   전시는 그로이스

요약을 하고 나니 연상되는 문장은 카르마를 강연하던 지금은 이름을 까먹은 한 인도인의 문장이다: 혼자 꾸는 꿈은 단지 꿈이지만, 모두가 꾸는 꿈은 현실이다(A dream that you dream is just a dream but a dream that everyone dreams is a re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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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화가 원미랑 그룹전

그림들/sf 중앙일보 2009/03/23 14:55 posted by 긴정한

사진 설명: “다양한 인상들: 베이 지역 추상(Diverse Impression:Bay Area Abstracttion)”이 열리는 트라이턴 아트 뮤지엄(Triton Museum of Art)내부. 왼쪽부터 , '떠다니는 꿈(Floating Dream)', ‘떠다니는 은(Floating-sliver)’, ‘이른봄(Early Spring)’. 사진 김정한. 그림 저작권은 화가 원미랑에게 있음.


트라이턴 아트 뮤지엄(Triton Museum of Art, 1505 Warburton Ave. Santa Clara)에서는 5 17일까지 “다양한 인상들: 베이 지역 추상(Diverse Impression:Bay Area Abstracttion)”이라는 이름으로 일곱 명의 화가들의 그룹전이 열리고 있다.  그들 중 한 명이 한국인 중견화가 원미랑이다.  전시장에 걸린 화가의 작품 세 점, '떠다니는 꿈(Floating Dream)',떠다니는 은(Floating-sliver), 이른봄(Early Spring)’,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서 화가와 한 시간을 보냈다.  

          세 점의 작품들은 모두 제한된 색상을 배경으로 한다.  예를 들자면 열 개의 패널들로 만들어진 작품 떠다니는 꿈(floating Dream)’ 에는 묵은 한지에서 볼 수 있을듯한 나이든 연한 노란색과 침착하게 가라앉은 회색, 깊이를 알 수 없지만 단호한 검은 색들이 배경을 차지하고 있다.  제한된 배경색들 위로 수 백 수 천 개의 셀 수 없이 많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당연하다는 듯 선들의 색 또한 깊은 생각과 태도로 걸러진 제한된 색상들이다.  그 색들은 선들이 그어지고, 겹쳐지며 깊이를 획득하고 형태(())를 이뤄간다.  색상들에서는 적은 것이 많은 것(Less is more)라는 미니멀리즘의 미학이 연상되지만 선들이 가지고 있는 많은 움직임들과 에너지에서 표현주의적인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떠다니는 은(Floating Sliver) 은 세 점의 작품들 중 중간에 놓여져 있다.  작품은 두 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다가와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좌측 패널의 확신에 찬 은색이 가로지르는 공간 하나.   상대적으로 멀리 놓여진 원들(좌측 패널)과 눈 앞으로 확 다가온 원의 표면(우측 패널)이 빚어내는 두 번째 공간.  다가온 원의 표면에 앉아 있는 작고 밀도 높은 강렬한 검은 조각들(너무 무거워서 원의 표면을 찌그러뜨릴 것 같은 이 조각들은 원을 만드는 선들이 얼마나 강하게 표면을 받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이 만들어내는 울렁거림.  열거된 세 가지 요소들이 엉키며 펼쳐내는 큰 공간은 오랫동안 그림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른 봄(Early Spring)'은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셀 수 없이 많은 선들로 이루어진 작품이지만 차분하고 조용히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공간이 열리며(이때 제목이 머리 속에서 겹쳐진다), 앞서 보았던 두 작품에서 찾아볼 수 없는 선명하고 진한 색채가 번져 나온다.  그 색채들의 이질감과 갑작스러움이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한다.  혹은 위에 언급된 세 작품들과 병렬져 있는 화가의 꽃 씨리즈에 담겨지는 공간으로 열려진 문일 수도 있겠다. (화가의 꽃 시리즈는 지금 샌프란시스코 대학(University of San Francisco) 로스쿨 안의 로턴다 갤러리(Rotunda Gallery)에 걸려져 있다.)

며칠 동안 한 화가의 작품들을 쫓아다니며 바라보고, 그 화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일련의 과정들은 흡사 한 소설가의 작품들을 모두 읽어내려 가는 것과 비슷하다.  공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평이한 일상의 경험들이 개별적인 예술가(화가 혹은 소설가)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남기는 과정.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일상과 예술가의 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흥미롭다.  그 관계는 다시 예술 작품(그림 혹은 책)을 보는 당신이 일상생활과 빚어내는 관계와 병렬적으로 놓여지고, 세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한 것인 지를 깨닫게 한다.  늘 그렇듯 새삼스럽게 말이다.


3/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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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메이멩:예스!가 열리고 있는 월터 앤드 맥빈 갤러리스(Walter and McBean Galleries). 사진 김정한. 그림 저작권은 화가 얀 페이밍에게 있음.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San Francisco Art Institute, 800 Chestnut, SF 415. 749.4563)안에는 개의 갤러리가 있다; 디에고 리베라 갤러리와 월터 앤드 맥빈 갤러리스(갤러리는 오전 11시부터 오후 6시까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열린다).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디에고 리베라 갤러리에서는 주로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학생들의 작품이 전시된다.  월터 앤드 맥빈 갤러리스에서는 5 23일까지 페이밍: 예스! (YAN PEI-MING:YES!) 전시된다.

          얀의 전시는 처음 접했다.  전시 도록을 따르면 그는 1960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1980년에 프랑스로 이주한 프랑스 화단에 스타로 떠올랐단다.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그림들은 정치인과 문화인들을 커다랗게 그린 초상화들이다.  예를 들자면, 모택동, 교황 2, 이소룡, 무명의 창녀들, 자화상, 얀의 아버지, . 

          1970년대를 중국에서 지냈으니 문화혁명의 영향을 받았겠고, 인터넷에서 얼핏 본 교황의 그림은 프란시스 베이컨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이소룡의 그림은 아직 찾아보지 않았지만, 제목만으로 앤디 와홀의 엘비스 프레슬리를 연상시킨다.  1980년에 시작된 프랑스 파리(Paris)에서의 생활은 곧 정리되고 1982년부터 프랑스의 다른 도시 디젼(Dijon)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갤러리로 돌아가자.  월터 앤드 맥빈 갤러리스에 걸려진 그림들은 커다란 군인들의 초상화(98.5x75 inches) 3점으로 시작된다.  그 오른쪽 옆으로 지금은 대통령인 오바마의 초상화(그림은 2008년에 만들어졌다)가 뒤를 따른다.  오바마의 뒤를 이어 전시장 이층에 나열된 그림들은 미국의 초석을 다진 대통령과 미국 역사에 굵직한 선을 그은 대통령들의 초상화들이다.  작고한 대통령들의 영향력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남아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우리는 그들의 얼굴을 담고 있는 화폐들을 주고 받는다.  

초상화들 중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은 오바마가 유일하다.  3명의 군사들은 각자 다른 개인적인 표정을 보여주지만, 그 표정들 뒤로는 커다랗고 공통적으로 읽혀지는 이라크 전과 죽음이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쉽게 두 가지가 공감되는 이유는 8년 동안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부시 정권에 시달린 사람들이 미국인들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적어도 미국 서부의 한 도시와 프랑스 동부의 한 도시가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다.  덕분에 중국태생 프랑스인과 한국태생 미국 영주권자가 죽음에 대한 한 단면을 공유한다.

짐작으로 끝날 수 도 있었던 이라크 전과 죽음에 대한 연상은, 전시장 일층과 이층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작은 방에 걸려져 있는 병사들의 관들을 그린 그림으로 구체적으로 현실화된다.  슬그머니 안도의 숨소리가 잴 수 없었던 상상의 어두운 범위를 벗어난다.  현실은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도 있고, 이리 저리로 도피할 수도 있고, 혹은 맞닥뜨릴 수도 있다.  안도는 관들이 그려진 그림과 맞서있는 아기들의 그림들을 바라보면서 방향을 튼다.  마음에 남는 것은 생과 사에 대한 또 21세기 초의 조명.  도대체 이 이중구조는 몇 천년을 지나고도 살아남아있으니 그것을 다시 대할 때마다 스물 스물 피어오르는 피곤함은 지루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 영구적이다. 

그 이중구조가 동전의 한 면을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한 면은 왕들과 군사들, 삶과 죽음의 간극을 메우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셀 수 없이 많고 다양한 초상들이다.  평범하게 살기(YES!)가 어려운 21세기 초를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상상이 현실과 버무려져, 담겨 자라나는 전시장은 월터 앤드 맥빈 갤러리스의 투명한 유리벽 밖에 펼쳐져 있다.


3/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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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일상

그림들/sf 중앙일보 2009/02/22 04:24 posted by 긴정한

Josephine Taylor, Bomb Landscape 3. Sumi ink, colored ink and colored pencil on paper. 93 ¾ x 76 ½ inches. Copyright Artist



화가가 얼마나 침울해질 있는 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화가는 그가 좋아하거나 말거나, 골목 길가에 쓰레기통을 뒤지는 고양이만큼 혹은 고양이 보다 예민하게 태어난다.  그들은 일년의 태반 이상을 자신들이 만들어가는 그림을 예민하게 쬐려 보고, 한탄하고, 화를 내며 작업실 문을 요란스럽게 닫고 거리로 나간다, 마치 다시는 작업실로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작업실 밖의 세상에서 화가에게 제일 궁금한 것은 다른 화가들의 작업들이다.  그러니 화가는 그가 살고 있는 도시의 갤러리들이며 뮤지엄들을 들락거리게 된다.  그렇게 발을 옮겨 놓은 갤러리에서 좋은 작품들을 만나게 되면, 다시 가슴이 뜨거워지고, 작업을 하고 싶은 욕구가 느껴진다. 

죠세핀 테일러(Josephine Taylor) 작품들은 종이에 먹과 칼라 잉크, 그리고 하얀 연필로 만들어진다.  그녀의 그림들은 , 체액, 끈으로 연결되는 육체적 관계를 다룬다. 근자에 들어 관계들은 강한 먹색이 지배하는 공간에 자리잡는다.  먹으로 채워진 공간을 벗어난 곳에 단조로운 살색들이 어두워지고 밝아지면서 이목구비, 손가락, 발가락 눈에 익은 모습들을 묘사한다.  이목구비들은 여러 가지 긴장된 감정들을 보여준다. 

그녀 작품의 기둥은 드로잉이다.  그녀는 자신의 드로잉이 가지고 있는, 관객의 관심을 끌어내는 힘을 통해 관객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경험이 그녀가 자라나면서 느꼈던 사랑과 증오를 쌍으로 하는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관객으로서 그녀의 그림을 즐길 , 그녀의 이야기는 그림을 이해하는 여러 가지 방법 , 가지 방법일 , 더도 덜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림들이 가지고 있는 치열함과 농밀함(그것들을 그림에 담아낸 그녀에게 찬사와 경의를!) 이야기로 우려내는 길은 관객들의 몫이다.  그녀의 그림들은 캐더린 클라크 갤러리(Catharine Clark Galley, 150 Minna St. San Francisco) 안쪽에 3 초까지 걸려진다.

갤러리들을 돌아다니고, 친구를 만나며 겨우 며칠이 지나면 화가는 다시 작업실 문을 열고, 그리다만 그림에 눈을 맞추고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림을 그리면 좀이 쑤시는 것이다.  신이 내린 무당이 굿을 안하면 몸이 쑤시는 것처럼 말이다. 

            침울한 시간들로 작업실이 홍수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림을 그리고 그리다가 보면 아주 간혹 그림에 몰입되어 황홀한 순간이 찾아온다. 일년에 정도.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다.  그리고 순간이 담겨진 그림은 명화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순간도 , 달이 지나, 순간이 담겨진 그림을 보면, 단순한 자아도취였을 경우가 많다.  황당함은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다.  이해해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혼자 씁쓸해지기 쉽상이다.  이런 경험을 번하고 화가에게, 센트 고흐(Vincent Van Gogh) 인생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 아니다.  단지 테오 고흐 같은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 어디 있을까한다. 

            그런 여러 가지 경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능과 그림에 확신을 유지할 있는 화가들은 계속해서 끊임없이 작업실 문을 연다.  세계 경제가 불황이라도 문을 연다.  급작스럽게 경매 회사 소더비(Sotheby’s) 주가가 크게 떨어진 , 다른 경매회사 크리스티(Christie’s) 조직 재편, 뉴욕 첼시의 화랑들이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부담스러운 현실이다.  그것이 작업실 문을 여는 빈도수를 떨어뜨릴 수는 있겠지만, 문은 계속 열린다. 


2/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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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한, 포트 마일리에서 본 태평양, 20”x60”, 아마포 위에 아크릴릭과 오일 페인츠


년을 넘게 축구를 함께 하던 친구가 며칠 전에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텍사스 주의 댈라스로 이사를 간다고 말을 건네왔다.  동안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만나서 공을 차고 달리고, 게임이 끝나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라고 여겼던 분명한 , 떠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란 가슴으로 있다.  (삼 년 전에 축구를 시작했을 때에는, 얼마나 공을 못찼는 지, 어쩌다 패스를 받아서 공이 발 안에 있으면, 혼자서 어쩔 줄 모르다 상대팀 선수에게 그냥 넘겨주고 어떻게 한 번 다시 뺐아 볼까 하면서 무턱대고 달리기만 했었다.  그래도 비슷하게 못하는 친구가 있어서 그냥 저냥 버티며 삼년을 지내왔는데.)  떠난다는 말을 듣기 분전까지만 해도 당연히 언제까지고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축구를 함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시내에서부터 기어리 블라바드(Geary Blvd.) 타고 서쪽으로, 그러니까 샌프란시스코를 구경하는 사람들은 번씩 들려서 절벽 밑으로 시원하고 길게 펼쳐지는 오션 비치를 구경하는 클리프 하우스(Cliff House) 향해서 계속해서 달리다 보면, 어느새 기어리 블라바드가 포인트 로보스 애브뉴(Point Lobos Ave) 바뀌고, 옆의 주택가들은 48(48th Ave.)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다.  48가를 조금 지나면 바로 차길 왼쪽 편에 바다 바위 여관(Sea Rock Inn) 보인다.  그리고 여관 앞의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엘카미노 델마 (El Camino del Ma St.) 따라 블락 길이 정도의 길을 올라가면 커다란 주차장이 눈에 들어온다.  주차장의 이름은 유에스에스 샌프란시스코 메모리얼 주차장(the USS San Francisco Memorial Parking lot)이다.  주차장 끝에는 쿼터를 집어넣고 금문교를 구경할 있는 망원경이 서너 설치되어있다.  곳이 땅끝 전망대(Land’s End Vista Point)이다.  그리고 망원경들 쪽으로 느긋하게 벤치들이 놓여있고,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골든 게이트 땅머리(Golden Gate Headlands) 눈에 들어온다. 

              전망 좋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수트로 하이츠 공원(Sutro Heights Park), 수트로 배스 유적지(Sutro Bath Ruins), 클리프 하우스(Cliff House), 그리고 골든 케이트 공원의 땅끝(Land’s End) 산책할 있다.  모두가 연방 금문교 국립 휴양지(the federal Golden Gate National Recreational Area ) 일부이다.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 교통을 이용하시는 좋아하시는 분들은 뮤니 버스 38번을 타고 포인트 로보스 애브뉴와 기어리 엘카미노 델마 교차로 근처의 정차장에서 내리면 된다. 

              수트로 배스 유적지에 있는 동굴에 들어가 파도가 치는 소리는 몸으로 느끼는 것은 신비스런 경험이다.  그보다 자주 찾아가는 길은 수트로 하이츠 공원 입구부터 동쪽으로 절벽을 따라 산책로이다.  산책로는 리젼 오브 어너(Legion of Honor) 북쪽으로 타고 돌아 1마일 정도 가량 계속된다.  길은 리젼 오브 어너에서부터 포장되어서 내려오는 엘카미노 델마 길과 만나며 끝난다.

              그리 길지 않은 산책로는 여러 가지 경치들을 가지고 있다.  경치들은 인상적이어서 사람에게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법하다.  여러 가지 핑계와 이유로 길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본 적은 없다.  식구들하고 걸어본 적도 번을 넘지 않는다. 그래도 경치에 흥이 나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다행스럽게 기회가 되어 다음 주면 샌프란시스코를 떠나갈 친구와 길을 같이 걸을 있었다. 


1/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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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과 그 호랑이들” 책 표지. 글: 쥬리어스 레스털, 그림:제리 핑크니



비싼 물가에 빡빡하고 빼곡하게 늘어선 주택들, 온갖 종류(?) 사람들이 섞여서 바글거리고, 맑은 대낮에도 길을 잘못 들면 별의 냄새가 풍겨지는 다운 타운, 그런 다운 타운에 가서 잠깐 주차할 곳을 찾는 다는 지푸라기들 사이에서 바늘 찾는 같은 샌프란시스코를 살아가는 재미들 하나는 샌프란시스코 어디에 살던, 걸어서 있는 거리에 그러니까 지척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니고, 아내가 살된 아이에게 읽어줄 그림 동화책들은 번에 정도 끊임없이 사오는 것이 아니고, 빌려온다는 것이다.  나는 아내와 번갈아 가면 틈날 마다 그것들을 딸에게 읽어 준다. 

              딸은 함께 그림 동화책 읽는 시간을 좋아한다.  사실인즉 그림 동화책을 읽는 시간을 읽는 시간을 좋아하는 것은 딸뿐이 아니다.  나도 좋아한다.  아내도 좋아하는 같다.  그림 동화책들 속에는 많은 종류의 글과 그림들이 담겨 있다.  책을 열면 우리 주변의 소소한 이야기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예를 들자면 중국 식당의 딤섬이나 한국에서 전학 어린 소녀혹은 엄마와 함께 치과등이 전자이고, “침대에서 뛰다가 아래 층으로 바닥에 구멍을 내고 아래 , 아래 층으로 떨어지는 아이”, “저녁 밥을 먹다가 엄마에게 혼이 나서 자기 방으로 가고, 자기 방에서 괴물들이 살고 있는 땅으로 갔다가, 물론 모든 괴물들의 땅은 아이의 상상이지만, 먹으라는 엄마 목소리를 듣고 다시 자기 방으로 돌아가는 아이”, 그리고 보드 게임을 가지고 놀다가 우주로 날아가는 아이들등이 후자이다.

              함께 책을 읽는 시간은 아이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자면 치과를 두려워했던 딸은 엄마와 함께 치과책을 여러 읽은 치과 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침대에서 뛰는 아이책을 읽은 후로는 서너 정도 침대에서 뛰는 행동을 자제했다.  그래서 나는 딸에게 백설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류의 책들은 있는 데로 읽어주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아이에게 읽어 주었던 그림 동화책들 중에서 망설임 없이 제일 재미있는 책으로 꼽을 있는 책은 쥴리어스 레스털(Julius Lester) , 제리 핑크니(Jerry Pinkney) 그림의 샘과호랑이들(Sam and the Tigers)이다.  이는 나만의 생각이 아니다.  딸도 아내도 책을 나만큼 좋아한다.  레스털과 핑크니는 아프리칸 아메리칸이고, 그들이 만들어낸 탄탄한 그림 동화책들로 많은 상들을 수상한 사람들이다. 

              책은 경쾌한 재즈 음악이 녹아있는 듯한 글과 탄탄한 상상력으로 색칠된 그림들로 알차서 번은 넘게 읽은 같은 지금도 읽을 때마다 재미를 준다.  그러니 급기야 딸과 나는 책의 주인공인 샘과 호랑이가 주고 받는 대화를 줄줄 외우게 되었다.  이를 깨달은 딸은 하루에 번씩 쪽을 쳐다보면서 호랑이가 하는 말을 던진다: “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