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urtesy of Art Projects International (API), New York
잔인한 4월이 차갑게 샌프란시스코의 봄을 식히며 지나가고 있다. 오랜만에 찾아간 샌 호세 다운 타운의 봄 볕은 보드랍게 따스하다. 뮤지엄 옆에 차를 새우고, 다운 타운을 달리는 날렵한 디자인의 전차 VTA 철도를 건너, 여러 줄기 물기둥이 화려하게 뿜어져 오르는 분수대(분수대 한 편 저 구석에서 젊은 연인들이 정신 없이 입맞춤으로 정열을 불태우는 모습이 다시 한번 봄을 상기시킨다)를 지나 샌 호세 뮤지엄 오브 아트(http://www.sjmusart.org/)로 향한다. 반가운 두 가지 전시가 열리고 있다. 뉴욕에서 30년 동안 활동하고 있는 재미 한국인 화가 이일과 네델란드인 에셔(M.C. Esher, 1898-1972)의 전시.
이일의 선(線) 추상화 200여 점이 뮤지엄 2층을 짙은 선(禪)으로 채우고 있다. 경이롭게도 그의 그림들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흔하게 만나는 볼펜으로 그려진다. 일상 속에서 볼펜 한 자루는 쉽게 여기 저기에서 잃어버려도 별 생각나지 않고 가볍게 여기 저기서 얻을 수 있는 소모품이다. 이일의 볼펜은 일상을 깊숙하고 힘차게 파고 든다. 일상의 가벼움을 큰 길 아스팔트의 표면을 파헤치는 드릴처럼, 드드드드, 샐 수 없이 무수한 반복으로 열어낸다. 한 줄 한 줄의 금이 그어지고, 금과 금이 겹쳐지고 겹쳐져서 이일의 공간이 열린다. 이 새로운 공간이 볼펜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 물론 작업 과정을 알고 난 후 시작된 추론이지만, 어쩌면 당연하다, 마치 지난 밤 지나친 술자리 반복 목운동으로 찾아온 숙취가 항상 반복되는 아침에 새로운 인생의 질감 입혀주는 것처럼. 혹은 큰일이 지나고 난 저녁 설탕 가득 입혀진 도넛을 12개 먹고 멍하니 텔레비전을 바라볼 때 주변에서 누가 뭐라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이일의 볼펜은 동양화의 먹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즉흥적이며 합목적적인 선들은 그 크기와 밀도, 엄청난 반복들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의 그림에 빠진 몇 분. 어렸을 때 수없이 많은 개미들이 줄지어 움직이는 것들은 아무 생각 없이 몇 일 동안이고 몇 분씩 바라보던 기억이 이일의 그림을 바라보는 경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해 있다. 가장 단순한 것들이 지니고 있는 최면적이고 명상적이면서 우주적인 진실.
뮤지엄 1층 로비 옆 방의 에셔의 판화들은 또 다른 방식으로 강하게 최면적이고 명상적이다. 그것들은 사물의 표면 안의 공간(Positive space)과 그 사물의 표면을 돌아 감고 있는 빈 공간(negative space)의 아이러니한 관계에 대한 공부들이다.
표면 안의 공간과 표면을 둘러쌓고 있는 빈 공간을 이해하기 위해 잠깐 냉장고를 생각해보자. 냉장고 문을 열면 음식을 담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냉장고 표면 안의 공간(Positive space)이다. 문이 닫혀져 있는 냉장고를 그려보자. 냉장고를 감싸고 있는 공기들이 있다. 이 공기들을 담고 있는 공간을 냉장고 표면을 둘러쌓고 있는 빈 공간(Negative space)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누리는 특혜 중의 하나가 사물의 표면을 둘러쌓고 있는 공간(negative space)을 사물의 표면 안 공간(positive space)과 대등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서서히 달라진다.
에셔의 눈은 두 공간이 긴밀하게 겹쳐지는 교류되는 제 삼의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에셔의 눈을 통해서 보여지는 제 삼의 공간은 황혼이 진 후 어둠이 시작되기 전의 멍함과 아침 해가 뜨기 전 차갑게 식어 딱딱해지는 공기처럼 기묘하고 강렬하다.
에셔의 전시는 4월 22일에 끝난다. 그리고 이일의 전시는 7월 8일까지 이어진다. 이일의 전시는
'그림들 > sf 중앙일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과거와 현재의 대화 (4) | 2007.05.14 |
---|---|
일상 (0) | 2007.04.30 |
촛불 하나 (5) | 2007.04.02 |
포트 펀스톤(Fort Funston) (2) | 2007.03.19 |
술이란 무엇일까? 주는 걸까? 받는 걸까? (4) | 2007.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