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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2.26 서울 시립 미술관, 르네 마그리트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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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Magic, 1927
Oil on canvas
80 x 60cm



여인의 나체를 하늘로 변화시키는 것은 마술의 행위이다.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2007년의 새해를 서울에서 맞았다.  2006년 말 칼날 같이 찬 바람을 맞으며 문을 열고 나선 인천국제 공항에서부터 시작된 여행. 3년 만에 다시 밟은 한국땅이다. 30년을 살아왔던 곳으로 돌아온 셈이지만, 긴 공백기가 빚어내는 문화충격은 작지 않다.  먼저 딸아이가 달라 보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살이던 아이는 서울에서 네 살이다.  아빠, 엄마, 우유, , , 주세요, 등 간단한 단어들을 말하는 아이가 자랑스럽던 처지는 물 건너갔다. 서울에서 아이는 단어 몇 개밖에 모르는 네 살짜리가 되었다.  콘텍스트를 벗어난 단어가 새로운 콘텍스트 안에서 얼마나 낯설고 새롭게 이질적인지가 아이를 통해 느껴진다. 다행히 아이는 능동적이다.  새로운 도시에 빠르게 반응한다, 마치 한 단어가 다른 콘텍스트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며 자리를 잡아가는 지를 보여주는 듯.  쉽게 만들지 못하던 한국말 문장을 며칠 만에 이야기하며 할아버지 할머니와 친해져 간다.

오래된 부모님의 집 창틀 구석에 낀 닦기 힘든 묵은 먼지처럼 낡고 오래된 서울의 이 구석 저 구석이 반가울 정도로 서울은 다른 모습이다.  서울이라는 창 안의 풍경은 새로운 번호를 달고 차선 중앙을 달리는 버스 시스템, 시청 앞의 스케이트 장, 고가도로가 사라진 청계천의 휘황한 밤거리, 섬에서 벗어나 남산으로 이어지는 숭례문, 강남 역 일대의 한껏 높아진 스카이 라인으로 가득하다.  발끝은 옛 것들, 변한 것들, 변해가는 것들 사이에서 서성거리며 괜찮은 생소함에 가득 젖어 든다.  새로운 서울을 익히는 느낌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고목의 새싹을 발견한 듯 신선하다.  이러 저리 새싹들 사이를 돌아다니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 전() 포스터를 발견했다.

전시장은 르네 마그리트에게 선택되어 독단적으로 둥둥 떠 들어나는 형상, 멀찌감치 서서 뒤를 지키는 배경의 형상, 그리고 형상들이 맺는 관계에서 생겨나는 느낌과 얽혀지는 사고를 명확히 보여주는 그림들과 사진들로 가득하다.  그림에서 보이는 연금술사적인 형상의 선택과, 병렬 혹은 직렬적인 조합들은 보는 이에게 극명한 생소함을,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혹은 기억 뒤편의 순수함을 건조하게 늘어놓는다.  그림을 감아 도는 긴장감은 조르지오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와 초현실주의의 영향이다.  몇 몇 그림에서는 알파벳의 단어가 나타나, 언어와 사물의 형상 사이에 틈을 역설한다.  영국인 미술 평론가 존 버거(John Berger)의 책 보는 방법(Ways of Seeing)의 표지로 사용된 파이프 그림은 중절모와 더불어 강렬하게 관람객의 기억에 각인된다.

전시에서 돌아와 마그리트의 그림과 바뀐 서울의 모습이 뒤섞여있는 머리 속에 부모님들께서 한 말씀씩 더해주신다.  수염이 그게 뭐냐? 이제 깨끗하게 밀어라.  못 본 사이에 얼굴도 까매지고, 꾀죄죄해졌네. 수염이라도 깎으면 좀 낳겠다.  서울이라는 배경 그림 위로 걸어 다니는 나의 얼굴 색과 수염은 부모님들 눈에 심하게 거슬렸던 것이다. 축구를 해서 볕에 그을려서 건강해진 거구요, 수염은 멋으로 기르는 거예요. 그러면서 슬쩍 자리를 뜬다. 그리고 나의 패션을 알아주는 사람이 어딘가 있는 척하면서 며칠을 버티련다. 그러고 보니 어쩌면 바뀐 것은 나인지도 모르겠다.

참고 웹사이트 http://www.renemagritte.co.kr, 한국어 버전에는 마그리트에 대한 글이 재미나고, 영어 버전에는 그림들이 있다.


2007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