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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과 젖가락, 그리고 선

카테고리 없음 2007. 10. 29. 15:37 posted by 긴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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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 미인도, 1825



대학 삼학년 시절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가 오른손을 다쳐서 한 동안 왼손으로 젖가락을 잡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군대에 갔는데 뭐 그럭저럭 버티는 데 별 이상은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혹은 주말에 빵을 먹으러 교회에 가나, 떡을 먹으러 절에 가나를 판단하는 게 중요한 일이었던 시절이었으니,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어느 손이든 작동이 조금 잘되거나, 약간 잘 안되거나는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왼손으로 익힌 젖가락 기술은 생각 밖으로 씀씀이가 있어서 오른손이 멀쩡한 지금도 가끔 왼손으로 젖가락을 잡는다.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사람이 별 재미없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 논다든지 할 때, 오른손 왼손으로 번갈아 젖가락을 이용하며 음식을 먹는 맛은 괜찮다. 

           땅콩을 젖가락으로 집어서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한국 사람들밖에 없어.”라며 젖가락 문화를 극찬하던 선배 한 명을 선술집에서 만난 건, 대학 졸업하고 광화문의 모 신문사에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1990년대 중반 신문사의 주류 문화는 술문화였다.  그리고 조간 신문사의 출근시간은 오전 10 정도였다.  출근해서 처음 하는 중요한 근무는 본사와 타사의 신문들을 챙겨보는 것이었다.  그래선지 오전에 신문사에서 동료들의 얼굴을 보기는 쉽지 않았다; 다들 신문 뒤로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신문 뒤에서 한 소리가 나온다.  밥 먹으러 가자.”  점심 시간은 넉넉하게 12부터 2시까지였다.  아시다시피 샐러리맨들-물론 여러 신문 기자들은 스스로를 샐러리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지만- 의 행복은 회사 근처 식당들의 다채로운 메뉴에서 비롯된다.  이 시간에 조금 잘 노는 선배를 쫓아가면 식사와 더불어 시작되는 소주 반주, 식사 후 분위기를 바꾸어 옮겨 가지는 짤막한 이차의 맥주를 얻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바지런(?) 하면 이차 후 노래방에 가서 일행들 모두 노래 한 곡씩 부르고 회사로 입장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오전이 지나고, 마감 시간과 함께 다가오는 오후는 상대적으로 부산했다.  오후 5 조금 넘어 마감을 마치고, 신문 초판이 인쇄돼 나오는 오후 7까지는 저녁 식사 시간.  마감 뒤 저녁 식사 시간은 점심 식사 시간보다 느긋하게 반주를 즐겼다, 그럭저럭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으니까. 

           신문 초판을 손에 들고 퇴근하며 오늘 정말 잠깐만 들러야지 하고 찾아가던 선술집에는 언제나 고정 출연하는 이 신문사 저 신문사 기자들로 북적거렸다.  시를 사랑하던 타 신문사의 그 선배를 만났던 곳이 바로 그 자리였다.  땅콩과 젖가락의 이야기는 한국 문화에 대한 선배의 자부심을 대표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10년이 훌쩍 지나 미국 대학생들에게 드로잉 기초 과정을 가르치는 지금 그 선배의 말이 떠오르는 건 젖가락 기술이 없는 그들의 손끝이 무뎌서이다.  섬세하고 미묘한 손놀림을 요구하는 젖가락 기술을 가지고 있는 한국 유학생들의 손끝과 미국 학생들의 손끝은 커다란 차이를 가지고 있다.  한국 학생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선의 종류는, 놀랍게도 별 훈련 없이, 숫자도 많고 다채롭다.  미국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반신반의하며 웃는다.  웃거나 말거나, 결국 미국 학생들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다양한 선을 그리는 연습을 한다.  왜냐하면 좋은 드로잉을 그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선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 삽입되어 있는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다채로운 선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결과적으로 어떤 학생들은 그 선들을 가지게 되고 다른 학생들은 그렇지 못하다. 

           수업을 마치고 혹은 수업 중간에 식사 시간이 되면 처가 정성 들여 쌓아준 도시락을, 다른 선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게 젖 가락으로 먹는다.  물론 같이 앉아 있는 선생에 따라 가끔은 왼손 오른손으로 번갈아 가며 젖가락을 사용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