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공과 태극기

그림들/sf 중앙일보 2007. 11. 12. 16:51 posted by 긴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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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삼십 서울에는 원짜리 짬뽕 공이 있었다; 어른 주먹 반만한 크기의 회색 고무공.  공에는 바람이 어지간하게 차있어서, 벽에 던지면 !’ 소리를 내면서 튕겨져 나왔다.  찰진 고무로 만들어진 고무공의 공기가 어디론가 빠져나가는 신기한 일이었다.  공기가 빠진 공을 보면, 우리는 바람 빠졌다하며 주사기를 찾아 다녔다.  주사기가 손에 들리면 공의 배꼽을 찾았다. 배꼽은 군데 안쪽에 콩알만한 고무 덩어리였다.  바람 배꼽을 통해서만 들어가야 했다.  배꼽이 아닌 곳에 주사기를 꽂으면 공은 끝장이 났다.  배꼽이 아닌 곳에 조그만 주사 바늘 구멍 때문에 공이 다시 탱탱해지지 않아서였다.

              초등학교 쉬는 시간 운동장에서, 하교 한옥집들 사이로 골목길에서, 동네 시민 아파트 사이의 공터에서 공을 주무르고, 던지고, 받는 아이들 만나기는 어렵지 않았다.  짬뽕 공이 필요할 때면 공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기억했다가, 친구 대문 앞에 갔다.  그리고 누구야~ 놀자하고 목청껏 부르면 끝이었다.  지금도 누구야~ 놀자하고 부르는 리듬과 박자는 머리 속에 생생하다.  짬뽕 공만 있으면, ‘짬뽕’, ‘왔다리 갔다리’,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상대를 공으로 맞추어 술래를 만드는 놀이를 해가 때까지 있었다.

              그런데 놀이 도중 흔하게 벌어지는 사고가 있었다.  공이 남의 지붕에 올라가 버리는 것이었다.  주인이 호랑이라고 불리는 까다로우신 어른이면 애당초 포기하고 가지고 있는 친구를 잡았다.  주인이 호랑이가 아니면 공을 꺼내려는 시도를 했다. 몸이 가벼운 친구가 창문을 보호하는 창살을 잡고 처마 바로 위까지 고개를 비스듬히 올린다.  아슬아슬한 자세에서 자세를 가다듬고 없이 손을 공이 놓여있을 법한 곳의 처마를 더듬었다.  그리고 이때 중요한 것이 집주인이 눈치를 채지 않도록 조용히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으면 공을 꺼내 내려오고 운이 없으면 집주인에게 걸려서 혼쭐이 났다.  그때는 의기양양해서 우리가 실력도 운도 좋아서 집주인 몰래 공을 되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되돌아보니 집주인이 맘이 좋아서 애들 하는 일을 웃어 넘겼던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며칠이고 놀다가 운이 좋은 하루는 엄마 손을 잡고 극장에 갔다.  보고 싶은 영화라며 조르고 졸라서 겨우 겨우 극장에 가게 것이었다.  상영 시간을 준수해서 영화가 시작되기 극장에 들어갔다.  왜냐하면 조금 늦게 극장에 들어가게 되면 불이 꺼져있어서 자리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불이 켜져 있을 자리를 찾아 앉으면, 스크린 위에 동네 여기저기 식당이며, 상가의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어느새 불이 꺼지고 광고가 사라지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영화가 애국가와 대한뉴스 뒤에 시작된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관객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태극기가 풍선에 매달려 바람에 날리는 모습, 무궁화가 가득한 스크린.  애국가가 나오는 동안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애국가가 끝나 자리에 앉으면 익숙한 억양의 대한뉴스가 세상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알려주었다. 

              당시 태극기는 굉장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따로 보관함이 있었고 태극기가 지저분해지면 빨지 않고 태웠다.  태극기를 게양하는 국경일이면 아침 일찍 일어나 아버지와 함께 깃봉에 태극기를 매달고, 대문에 걸어 놓았다.  그리고 골목길을 돌아보면 집집마다 태극기들이 게양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에, 우리 모두가 바른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