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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와 왕

그림들/sf 중앙일보 2007. 2. 26. 10:04 posted by 긴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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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 캔버스에 접착된 양피지에 유화 65 x 48 cm 1538-9

 

9 17일까지 리젼 오브 어너(링컨공원 안, 34th Avenue Clement Street)에서 노르만디의 모네(Claude Monet in Normandy)전이 열린다.  못 보면 후회할 전시다.  대학 시절 유럽의 미술관들을 돌아보겠다는 생각에 떠났던 배낭 여행. , , 고 미술 교과서에 조그맣게 조악하게 인쇄된 그림들을 실제로 바라보았을 때의 충격은, 거의 월드컵을 19인치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과 축구장에서 직접 보는 것만큼 커다란 차이가 났다.  그러니 코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네의 전시를 놓치는 것은 행복 1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는 모네는 드가(Edgar Degas), 르느와르(Auguste Renoir), 세잔(Paul Cézanne)과 어깨를 겨누는,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창조한 작가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옛날 화가들이 하던, 왕과 귀족들의 사진기 역할을 벗어 던졌다.  그 배면에 초기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경제 체제와 왕권 붕괴 후 재조정된 사회 가치가 자리잡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해 있는 2006년의 화가 혹은 시각 예술 작가들의 작품들은 그림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비디오, 행위 예술 등 창작의 영역이 넓어졌다.  그 와중에 전통적인 창작 행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그림 그리기라는 행위를 계속하는 작가들과새로운 창작에 의미를 두는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갈등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심화되었다.  끊임없이 문화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미국에서 작가들간의 갈등은 오히려 당연하다.  문제는 흑백으로 치달으며 벌어지는 대화의 단절.  북한 미사일 문제처럼 적대적이고 단절적인 상황은 일반 대중으로서 개인에게 재미가 없다.

              체제와 거대 담론들은 권력층과 그 주변의 득권자들에게 만큼, 하루 하루 생활을 꾸려가는 개인들에게 연관되지 않는다.  부단한 텔레비전과 신문 등 매스 미디어들에서 분출되는 거대 담론들과 이미지들을 피하기가 쉽지 않지만, “배 고픈데 라면 끊여 먹을까?”하는 한마디보다 개인에게 다가서는 거대 담론과 프로파간다를 찾기는 하늘에서 별 따기다.  그렇다면 권력자와 권력층의 이익과 행복이란 얼마나 특별하고 중요한 것일까?

             1539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8(Henry VIII)  네 번째 부인을 결정하기 위해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을 클리브스로 보낸다.  그 곳 공작의 힘을 얼으려는 책햑과 더불어, 두 자매 중 앤(Annes)의 얼굴을 그림으로 보고 결혼 여부를 결정하려 했던 것.  그런 왕의 생각 덕분에 우리는 홀바인이 그린 클리브스의 앤(Anne of Cleves)라는 명작을 접하게 되었다.  관람자의 시선을 다소곳이 피하는 그녀의 태도, 피부색에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주홍의 주름들이 흘러내리는 의복, 그 위로 겹쳐지는 장신구, 그녀와 의관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배경의 녹색.  그림을 본 후, 헨리 8세는 당연히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비극은 런던으로 찾아온 앤의 모습이, 그림을 본 후, 기대로 꽉 찬 왕의 눈에 차지 않아서 시작되었다.  왕은 프랜더즈의 말(a Flanders mare)이라고까지 언급했다.  결혼을 취소하는 왕의 노력은, 조약 때문에 무산되고, 둘은 1540년 초에 결혼해서, 같은 해 중순에 이혼했다.

              예나 지금이나 왕들과 권력자들도 개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들이고,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지기 위해 힘을 쓰는 것이 당연지사인 듯 하다. 귄력과 무관한 대다수 개인에게, 다행인 것은 개인의 권리와 지위가 역사 속에서 상위 조절되어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리젼 오브 어너가 샌프란시스코에 있고 모네의 전시를 볼 수 있다는 것.

 


200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