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한(Jung Han Kim, www.kimfineart.com)의 그림놀이터

터너(Turner, Joseph Mallord William) 놀함 성 일출(Norham Castle, Sunrise) c. 1835-40 Oil on canvas 35 3/4 x 48 in. (78 x 122 cm) Clore Gallery for the Turner Collection, London

이런 저런 이유로 크리스마스 바로 전주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집 전화 번호를 바꾸기 위해 전화 회사 직원과 통화를 한다.  저쪽 끝에서 남자 직원이 “휴대 전화번호가 몇 년 동안 같네요. 축하 드립니다.” 한다.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해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더니, 지난 몇 년 동안이 순탄해서 휴대 전화번호를 안 바꾸고 지냈으니 축하할 만한 일이란다.  흠.  그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새 전화번호를 받은 후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처음 듣는 싱거운 말이다 싶었는데 그 말 때문에 지난 몇 년을 떠올렸다.

              올 가을 학기가 끝나는 마지막 주에는 깜짝 파티가 두 번 있었다.  학교를 은퇴하는 교수들이 둘 있어서였다.  한 선생은 별다른 직급 없는 평범한 교수였고 다른 한 명은 대학원 디렉터였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알고 있고, 두 사람 모두 같은 대학을 나와 비슷한 시기에 뉴욕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샌프란시스코의 한 대학교에서 강의를 10년 넘게 지속해 왔다. 

              보통 교수를 위한 깜짝 파티는 교직원실 안에서 벌어졌다.  스무 명 내외의 동료들이 모여 천장에 풍선들을 달고, 그 사람의 이름을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자그마한 선물을 준비했다.  떠나가는 사람이 방에 들어와 상황을 파악하고, 두 눈이 커지고, 여러 가지 감정이 섞인 미소를 얼굴에 담는다.  채 그 감정이 사라지기 전에 동료들이 그의 손을 한 번씩 잡아보고 혹은 그를 안아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들어보고 주문 배달된 피자를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중 옆자리의 동료가 한 마디 물어온다.  “당신 은퇴할 때가 상상이 돼?”

              디렉터로 일했던 교수가 은퇴하는 깜짝 파티는 규모가 컸다.  장소는 학교 갤러리, 음식은 외부 케이터링 서비스 업체가 제공했다.  인사를 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도 동료들, 학교 직원들, 학생들 등 가지 각색으로 다양하다.  자리는 캐주얼하다.  딱히 식순이랄 것도 없지만 중요하고 인상적인 부분은, 은퇴하는 교수는 저 쪽에서 차례를 기다려 마이크를 잡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서 있고, 마이크를 잡은 사람들은 떠나가는 나이 많은 교수를 바라보며 지난 추억을 떠올리고, 감사하고, 은퇴를 축하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고, 사람들이 가지 각색이니 그들의 이야기도 여러 가지 색으로 칠해진다; 농담으로 일관하는 사람, 울음을 참지 못하고 사람, 지난 추억을 사진을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 둘 들춰내는 사람.  많은 이야기들의 마침표는 은퇴하는 교수의 화답으로 장식된다.  “그 동안 많은 화가들, 선생들 그리고 학생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을 수 있다.  모두에게 고맙다”

              두 교수들의 깜짝 파티가 벌어지던 주에 한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평소에 따로 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따라갈 시간이 없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를 따라가봐도 그 소식들이 현실이 아니니, 실감이 나지 않는 이곳에서도 대통령 선거는 귀를 현혹하는 뉴스들 중 하나다, 항상 정치인들은 뭐 다 마찬가지지 하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도 말이다.  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요란하게 시작되는 대통령의 임기, 그 끝도 노교수들이 은퇴할 때처럼 많은 사람들의 감사 인사와 축하를 받으며 마무리 된다면 괜찮겠다.  그리고 지난 해들처럼 내년에도 휴대 전화번호를 계속 간직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2007년 12월 24일

터너, The Grand Canal, Venice , 1835
Oil on canvas
36 x 48 1/8 in. (91.4 x 122.2 cm)

아버지의 날, 월드컵의 열풍에 휘말려, 전시 준비로 바빠야 하는 시간에, 텔레비전을 바라보며 과자를 까먹고 있었다. 토고전 이천수, 안정환의 두 골에 그랬듯이, 프랑스전 박지성의 동점 골에 소파를 박차고 일어났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하늘을 찔렀다. 힘차게 박수를 쳤다. 속이 시원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 물론 이때 브라질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경기 전 방영되었던 브라질 선수 로날디노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졌던 기억은 전혀 없다.

              브라질의 스타 로날디노.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어떻게 저렇게 공하고 혼연일체가 되어서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거지?’ 하고 있는데, 곧 한 해설자의 말이 뒤통수를 친다. “굉장한 상상력이고 창조적인 움직임입니다.” 그렇다. 충격적인 로날디노의 움직임은 상상력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상상력은 끊임없는 연습으로 얻은 움직임으로, 현실에 창조되었다. 상상력과 창조력은 예술가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그러니 당연하게 이 충격이 생소하지 않다. 영국이 자랑하는 화가 터너 (Turner, John Mallord William 1775-1851)의 풍경화를 책에서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어디서 저런 하늘을 봤기에 저렇게 그릴 수 있는 걸까?’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 글 읽는 것을 배운 것이 교육의 전부였던 터너. 열 세 살의 그가 그린 그림들은 아버지의 이발소 창에 최초로 전시되었다. 그 후 그의 그림들을 거침없이 새로운 무대의 막들을 올렸다. 15세에 로얄 아카데미에 그림을 전시했다. 큰 영광이었다. 18세에 스튜디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20세에 그림 인쇄업자들의 수요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다. 쫄쫄 굶으며 동시대를 걷다 지나간 수많은 화가들에 비하면 예외적이었다. 그러니 그가 사후 남겨질 막대한 유산을 등이 휘어가는 화가들을 위해 사용되길 바랬던 것도 쉽게 이해가 된다. 비록 괴짜로 그림 팔기를 거부하고, 홀로 평생을 여행길에 몸을 실으며, 몇 달 동안 사라졌다 나타나고, 친구도 없이 인생을 그려갔지만, 다른 화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피할 수 없었던 듯 하다.

터너의 창조력은 수 많은 화가들이 그랬듯이, 티션(Titian, 1485-1576)과 렘브란트(Rembrant van Rijn, 1606-1669) 등 옛 거장들의 그림을 배우면서 자라났다. 그의 상상력은 셀 수 없이 많은 철학자들이 그랬듯이, 자연을 관찰하면서 공고해졌다. 그의 풍경화에 펼쳐지는 빛과 색은 이탈리아의 베니스, 로마, 나폴리의 찬란한 볕에 빚진다. 1830년대 이후 드디어 그는 사물의 모습과 형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 결과, 색에 대한 그의 상상은 사물들의 모습과 형상을 색의 조화로 변조시켰고, 캔버스에 번졌다. 터너의 천재성이 꽃을 피운 것이다. 그리고 터너 이전의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추상에 대한 느낌이 캔버스에 잉태되었다. 20세기 초반 추상표현주의 작가 로스코 (Mark Rothko, 1903-1970)의 그림들이 가능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터너의 그림들은 칼라로 보아야 제 맛이 난다. 시간 나실 때 인터넷에 접속하셔서 http://www.artchive.com/ftp_site.htm에 가신 후 화면 왼쪽에 주욱 알파벳순으로 줄 서있는 수많은 화가들의 이름들 중 터너(Turner)를 클릭해 보시길.

2006년 6월쯤